'그때만' 쓸 수 있는 이야기, 감정들 그리고 마음

<오롯이, 혼자> 저자 김현경

입력시간 : 2020-01-20 22:02:19 , 최종수정 : 2020-01-20 22:02:19, 오도현 기자



책 소개


 <오롯이, 혼자>는 김현경 작가의 에세이다.

 책은 김현경 작가가 글쓰기 어플리케이션 '씀'에서 #6C7A89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짧고 길게 쓴 글들을 담았다.

 2017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출판사 '웜그레이앤블루'에서 글을 다듬고 표지를 새로 입혔으며, 몇몇의 글이 더 추가되었다. 또한 작가가 쓴 <폐쇄 병동으로의 휴가>, <여름밤, 비 냄새>의 원형이 된 글들도 담겨있다. 김현경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눈여겨 본 독자들에게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갈 것이다.

 

 다음은 책에 수록된 작가의 말이다.

 「"2017년 겨울 동안 1쇄를 소진하고 절판한 책입니다.

 기억해주시는 분들로부터 더 만들 예정이 없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저는 이 책이 더 읽히는 일이 '부끄럽다' 생각했습니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어두운 골목에 쭈그려 앉아 때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썼던, 제 날 것 그대로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우연히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쓸 수 있는 이야기, 감정들, 마음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는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 없어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만 같았거든요. 글을 다듬고 표지를 새로 씌워 발간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조금은 따듯한 날들을 가지길 바랍니다."」



<출처: 노말에이>



저자 소개


 저자: 김현경 




목차


 총 192페이지




본문


 과연, 이라는 말은 아직도 많은 것들을 어렵게 만든다. 함께 걷던 사람은 내 얘길 듣고는 "아냐, 잘 하고 있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싶었다.


 - '의심' 중에서 -



 그 누구라도 보고 만나는 것에 지쳤다. 애써 괜찮아요, 하며 대충 웃고 궁금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묻고 듣는 모든 상황들에 질렸다. 약속을 거절하고 커피도 혼자, 술도 혼자 마셨다. 혼자임이 익숙하기도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타인에게 써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웠다.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누군가 한발짝 가까이 오려 하면 굳게 빗장을 닫았다. 너는 사람을 좋아하잖니, 누군가 말한다면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 답했을 것이다. 함께라는, 우리라는 말들은 의미가 없었다. 


 얼마 전 "우리가 친구잖아요." 라는 말을 들은 때였다. 그 말을 듣고서야 '우리'와 '함께'가 필요해졌다. 


 - '함께' 중에서 -



 강남역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학원까지 걸어가는 길 내내 모든 건물 외벽의 광고들이 높은 토플 점수가 없는, 나는 인증되지 않은 무언가 결여된 사람임을 알렸다.


 사람이 가득 찬 밤의 강남역 거리에서 가야할 길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뒤통수로 가득한 사람들의 흐름이 이곳이 길이라고, 이쪽으로 가면 학원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때 출구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나는 앞사람의 뒤꿈치를 밟을까 노심초사하며 그의 뒤꿈치만 보고 걸었다. 느리고 규칙 없이 떼어지던 발걸음에 나는 앞사람의 발꿈치가 떼어지면 내 걸음을 떼었다. 때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출구를 올려다보곤 했는데, 저 먼 위의 출구를 바라보면 걸음을 떼기가 망설여졌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한참을 걸어야 출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 강남역 계단이 마치 내 삶 같았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고 이곳이 올바른 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걷기에 길이라 생각하고 따라갔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출구인지, 위를 바라볼 수도 없었다. 앞사람과 부딪힐까 뒷사람에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금 빠르지도 느리지도 못하게 속도에 맞춰 걸어오를 뿐이었다. 


 그렇게 다 올라 빠져나온 출구 앞에는 한칸짜리 책상 의자가 미어터지게 들어찬 강의실과 몇 분 간격으로 인쇄물을 내어주는 수업의 토플 학원이 있을 뿐이었다. 그 발꿈치들에 일주일 만에 신물 나 학원을 그만두었다. 


 때로 나는 그때 내가 그 강남역 계단을 조금 더 별생각 없이 오를 수 있었다면, 모르는 이들의 발꿈치를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졌더라면, 강남역 건물 외벽 광고들이 알려주는 사회의 필수 덕목을 갖추었더라면, 생각한다.


 - 104페이지 중에서 -



 뚜렷하지 않은, 언제인지 알 수는 없는, 경계는 희미하지만 명확하게 존재하는 날이다. 이를 달력에 표시한다면 펜으로 여기, 그려내며 표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수채화 물감에 물을 듬뿍 묻혀 이쯤, 이라며 칠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라는 때는.


 새벽, 집 앞 골목에서 어떤 생각이 자라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생각에 대한 문장은 '언제부턴가''로 시작했어야만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의 말투를, 콧소리의 농도를, 웃음의 색을 글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옮겨다 놓고 싶었다. 더 듣고 봐야만 하는 일이었다. 


 - '언제부턴가' 중에서 -



 새벽녘 선잠에 그를 떠올렸다. 창에 비치는 푸른 빛과 새로 꺼낸 부드러운 여름 이불에 기분이 좋았다. 


 지금에 그를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사는 곳이, 살던 곳이 어딘지도 듣고는 바로 잊었을 정도였다. 달라진 것은 아마, '이제 더는 볼 일이 없겠지?' 생각한 후였다. 반쯤 잠든 채로 며칠간 형체도 없이 둥둥 떠다니던 문장들을 엮어 보려 애쓴다. 


 그 비 오는 밤길에서 나는 드디어 내게 주연이었다. 흐릿하면서도 또렷한 배경의 작고 오래된 동네는 마치 누군가 꾸며 놓은 촬영세트 같았다. 사소한 농담과 사소한 눈의 순간들은 늘어진 테잎 처럼 조금 더 길게 지나갔다. 장난들은 때로는 그만큼 가까워진 것 같아 좋았고 때로는 또 그만큼까지 가까워진 것만 같아 싫었다. 내가 그런 눈과 그런 미소를 언제 마지막으로 가져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의 말들은 때로는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고 때로는 따뜻한 선율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 말들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그러지 않았다. 때로 나의 멍청한 말들을 덧붙이면 그 앞에서 내 말들은 초라하고 덧없이 흩어지기만 했다. 그 흩어진 말마저도 나의 홀로된 말들에 비하면 훨씬 아름다웠다. 


 숨겨둔 누군가의 문장을 다시 꺼내 읽는다. 

 "나로 사는게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이 온 뒤로 나는 당신이 되고 싶었다. 당신이 되어 당신의 온 과거 속에 함께 있고 싶다."

  기명희, <이 바람을 얼마나 그리워 했던가> 중


 나는 이보다 좋은 문장을 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의 지난 시간이 궁금해졌다. 내가 듣고 볼 수 있는 그의 지난 날들에 문득 초라한 나를 떠올렸다. 그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게 될 지 궁금해, 나의 지난 말들을 얼굴들을 그가 되어 되짚었다. 언제나와 같은 체념보다는 작은 욕심을 가졌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들은 노래를 듣는다. 읽는 글과 듣는 노래가 꽤 많이 달라질 것이다. 


 - '웃음' 중에서 -



 술에 취하고 또 취해서 그에게 결국에야 했던 말은,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녜요, 였다. 구구절절 써 놓은 글들에 비친 나를 보며 열일곱 고등학생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구나, 가질 수 있었구나, 생각했다. 나는 나쁜 사람이라며 나를 좋아하지 말아주세요, 알고 싶어 하지 말아주세요, 라던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조금, 아주 조금은 가질 수 있었다. 


 김연수는 <사랑이라니 선영아>에서 사랑은 자신의 확장이며 그것이 끝나는 일은 다시 자신으로의 수축이라 말했다. 


 오롯이 나로서, 나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편했다. 익숙함도 오래된 친구도 편안한 집도 필요치 않았다. 언제라도 어딘가에라도 멀리 떠나 버릴 준비를 하며 살았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겠다는 생각에 발목 언저리엔 날아가는 새를 그려 넣었다. 조금 발 붙일 곳과 마음 붙일 사람이 필요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지금껏 보아온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색깔의 사람이었다. 그는 여름밤 가로등 같은 사람이었고 나는 이름 없는 날벌레 같은 것이었다. 날벌레는, 그러니까 나는, 이자카야 야외 테이블에서도, 조촐한 앉은뱅이 술상 앞에서도, 해장국 집에서도, 그에겐 잊혀질 다짐들을 매번 했다. 그렇게라도 익숙한 사람이 필요했다. 


 욕심이 나서, 그 욕심에 조바심이 더해져서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딪혔다. 고량주와 사케에 취해 내가 부딪혀도 그는 미동도 없던 것처럼 말이다. 내게 주어진 것은 잡을 수 있던 옷깃, 그 정도였던 것이다. 모든 게 어려웠지만 동시에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다. 

 

 내 주제에, 나 같은 인간이 어딘가 발 붙이고 맘 붙일 일은 언제나 그랬듯 사치였다. 확장된 나는 떠날 일이 생겨도 그러지 않았던, 수줍어 할 말을 다 해내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욕심내는 어린 여자였다. 


 확장된 나는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두어 달 후의 계획도 잡았지만, 수축한 나는 여전히 발도 맘도 붙일 곳 하나 없는 부유하는 존재였다. 결국 이 짧은 여름은 여전히 그것이 나였던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익숙한 일이다.


 - '익숙함'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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