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 감면·특별회계 빠진 'K-스틸법'
업계 “제도 틀은 생겼지만 전환 비용은 각자 부담”
[소셜밸류=이국열 기자]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올해 1월 비용을 매기는 확정 단계에 들어서면서 국내 철강업계 앞으로 ‘탄소 청구서’가 쌓이기 시작했다. 올해 EU로 들어간 물량부터 탄소비용이 붙는다.
정부는 지난 6월 17일 이른바 ‘K-스틸법’을 시행하며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업계가 가장 절실하게 요구해 온 전기요금 부담 완화 방안은 법과 시행령 어디에도 담기지 않았다.
수소환원제철 등 저탄소 전환도 지원 근거만 마련됐을 뿐, 대규모 설비 투자를 뒷받침할 재원은 빠졌다.
23일 관련 업계에서는 CBAM에 대응할 제도의 뼈대는 세웠지만 정작 돈이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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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코가 전남 광양제철소에 연산 250만톤 규모의 대형 전기로를 준공하고 본격적인 탄소 저감 강재 생산에 나섰다. 사진은 광양제철소 고로 전경/사진=포스코 제공 |
◇ 8년 새 6.6배...가파르게 불어나는 탄소비용
CBAM은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력·수소 등 6개 품목을 EU로 들여올 때 생산 과정에서 나온 탄소 배출량만큼 인증서를 사서 제출하도록 한 제도다. 인증서는 EU 수입업자가 사지만, 그 비용은 결국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 부담으로 돌아온다.
지난해까지는 배출량만 보고하면 됐지만 올해 수입분부터는 실제 비용이 생긴다. 인증서 판매는 내년 2월 시작되고, 올해 수입분은 내년 9월 30일까지 정산해야 한다.
EU 집행위원회가 공표한 인증서 가격은 1분기 톤당 75.36유로, 2분기 75.28유로였고 3분기에는 82.32유로로 올랐다.
부담은 철강에 쏠린다. 지난해 한국이 EU에 수출한 CBAM 대상 품목 가운데 88.3%가 철강이었다. 대EU 철강 수출액은 약 34억달러로 전체 철강 수출의 11.5%를 차지한다.
산업은행은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의 분석을 인용해 국내 철강업계가 부담할 CBAM 인증서 비용을 올해 약 851억원으로 추정했다.
이 비용은 2030년 3086억원, 2034년 5589억원으로 6.6배 불어난다. EU가 역내 기업에 주던 무상할당을 줄이는 만큼, CBAM 적용률이 올해 2.5%에서 2030년 51.5%, 2034년 100%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는 기업이 별도로 대응하지 않으면 CBAM 대상 품목의 대EU 수출 물량이 2030년까지는 0.9~5.3% 줄어드는 데 그치지만, 무상할당이 급감하는 2031~2034년에는 감소 폭이 최대 17.9%까지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통상 장벽도 겹쳤다. EU는 7월부터 철강 세이프가드를 대체하는 새 수입 규제를 시행해 전체 무관세 할당량을 약 46% 줄이고, 할당량을 넘는 물량에는 50% 관세를 물리고 있다.
한국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으로 전용 쿼터 감소 폭을 19.7%(207만3000톤)로 막았지만 부담이 커지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 전기로는 켰는데...수소환원제철 상용화는 2037년
업계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다. 포스코는 지난 6월 약 6000억원을 들여 광양제철소에 연산 250만톤 규모의 국내 최대 전기로를 준공했다. 현대제철은 2월부터 당진제철소에서 전기로와 고로 쇳물을 섞는 복합 공정으로 기존 자사 고로 제품보다 탄소 배출을 약 20% 줄인 강판을 양산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 해법으로 평가 받는 수소환원제철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포스코는 2028년 포항에 연산 30만톤 규모의 하이렉스(HyREX) 실증설비를 준공하고 2030년까지 상용화 기술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정부 로드맵상 250만톤급 규모 확대는 2031~2036년, 본격 상용화는 2037년부터다. 그때까지는 탄소비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대형 철강사들은 전기로 비중 확대 등 대응 노력을 이어가고 있지만 탄소비용 상승은 불가피하다”며 “중소 철강사들은 막대한 설비 투자로 공정을 개선해야 하는데, 정부의 강한 지원이 없으면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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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로 복합프로세스에 사용되는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전기로/사진=현대제철 제공 |
◇ K-스틸법서 빠진 것…"가장 절실한 요구"
6월 17일 시행된 K-스틸법(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의 주요 골자는 ▲국무총리 소속 철강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 신설 ▲저탄소철강 인증제 도입 ▲저탄소철강특구 지정 ▲재생철자원 가공전문기업 육성 ▲사업재편 기업에 대한 공정거래법 특례 등이다.
한국철강협회는 지난해 11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1986년 철강공업육성법 폐지 이후 약 40년 만에 철강산업 지원 법률이 제정됐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문제는 전기요금이다. 전기로와 수소환원제철은 고로보다 전력을 훨씬 많이 쓰는데, 산업용 전기요금은 2022년 kWh당 105.5원에서 지난해 4분기 185.5원으로 약 75% 올랐다.
나주영 포항상공회의소 회장은 “제조 원가에서 전기요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철강업계가 그동안 가장 절실하게 요구한 에너지 부담 완화 방안이 시행령에 반영되지 않은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법 제정 과정에서 거론된 철강산업특별회계도 기획재정부의 반대 등으로 최종안에서 빠졌다.
정부는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시행령 초안 단계에서 “시행령은 법안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는 것”이라며 “법안에 담기지 않은 것을 새롭게 만들어 반영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특정 업종의 전기요금을 깎아주면 세계무역기구(WTO) 보조금 규정에 어긋날 소지가 있고, 다른 업종과 형평성 문제도 있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국회에서는 보완 입법이 이어지고 있다. 어기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6월 대표발의한 이른바 ‘K-스틸법 2.0’ 패키지에는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의 산업용 전기에 붙는 전력산업기반기금 부담금(전기요금의 2.7%)을 면제하는 내용이 담겼다.
철강협회는 이 법안이 “저탄소 전환을 위해 전력 사용량이 증가하게 되는 철강산업 에너지 비용 부담 완화에 실질적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 위험은 국가가 나눠 져야…연말 나올 업종별 로드맵엔
전문가들은 기업 혼자 전환 비용을 감당하는 구조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도 보완책을 검토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기업이 감축 설비에 투자하면 일정 기간 탄소 가격을 보장해 주는 ‘탄소차액계약제도(CCfD)’를 검토 중이다. 배출권 시장가격이 약정 가격보다 낮으면 그 차액을 정부가 보전해 주는 방식이다.
이달 7일에는 2035년까지 10년간 재정 200조원과 기후금융 790조원 이상 등 모두 1000조원을 투입하는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도 내놨다. 철강 부문에는 7868억원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30만톤급 실증과 함께 ‘기업 투자를 전제로 한 저렴한 전기의 안정적 공급 방안’이 포함됐다.
다만 1000조원 가운데 철강 몫이 얼마인지, 전기요금 지원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는 연말 나올 업종별 로드맵을 기다려야 한다.
CBAM은 2028년부터 자동차 부품 등 철강을 쓴 하류 제품으로도 확대될 예정이다. 탄소비용이 전방산업으로 번지기 전에 재원을 얼마나 빨리 마련하느냐가 철강 전환의 성패를 가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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