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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너무나 미약하리라

Jess / 기사승인 : 2020-02-10 16: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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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만난 놈은 쉽게 끝나는 법

쉽게 만나면 쉽게 헤어진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든 무슨 상관이냐고, 사람이 중요한 거 아니냐고. 그래서 어느 금요일 밤 감성주점에서 만난 그 사람과도 진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참으로 순진하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결혼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사냥감 대신 신붓감을 찾으며 매의 눈으로 술집 안을 스캔했을, 그런 사람. 키도 나랑 비슷하고 딱히 눈에 띄는 스타일도 아니었는데, 하도 적극적으로 애정 공세를 하기에 마지못해 번호를 넘겨줬던 것 같다. 몇 번 만나기도 전에 매일 같이 전화를 걸어 댔다.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못해도 한 시간씩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여자들 아니 내가 지겹도록 했던 착각. 아, 이 사람은 특별한 것 같아. 다른 남자들이랑은 달라..! 의 늪에 또다시 빠져버린 것이다.



말하다 보니 공통점도 많았고 능력도 좋은 사람이었다. 집도 잘 살고 돈도 잘 버는 건 알겠는데, 그걸 끊임없이 어필했고 그런 만큼이나 나를 이리저리 재고 계산했다. 새로 옮긴 직장 연봉이 얼마인지 슬쩍 물어보더니 에이 그것밖에 안 돼? 큰 회사라 더 줄 줄 알았는데-, 지금 집은 그래서 월세야 전세야? 그런 식이었다. 나는 애초에 잘 사는 집 딸도 아니었으며 돈을 대단히 잘 벌지도 못했지만 그에게 조금도 아쉬운 것은 없었다. 내가 네다섯 살 더 어려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내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높은 기준에 맞는 것 같지도 않은데, 자꾸 부모님 인사를 드리자는 둥 집에 놀러 오라는 둥 급하게 서두르는 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은 데이트를 하기로 했는데, 회사에서 하루 종일 작업한 번역 문서가 날아갔다며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내일까지 당장 끝내야 한다길래 반씩 나눠서 같이 붙들고 끙끙 머리를 싸맸다. 건축 설계 관련 전문 용어가 가득해 못 알아먹는 것 투성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끝냈다. 지금 생각하니 어리석은 짓이었다. 고작 그런 이에게 그토록 내 가치를 드러내고 인정받으려 했더 모든 노력들이, 너무나 의미 없고 안쓰러운 행위였다.



그는 나를 끝없이 시험에 들게 했다.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라는 드라마가 할 때였는데, 뜬금없이 인터넷 댓글창 얘기를 하며 사람들이 송지효와 이선균 편으로 나뉘어 싸움이 붙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런 상황이면 바람을 펴도 허용이 된다고 생각해?! 제가 더 흥분해서 따지듯 물었다. 주변에 누나들이 많아서 잘 아는데 여자의 적은 여자라든가, 여자는 서른이 넘으면 안 팔리니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시집가야 된다거나, 운전을 조금이라도 미숙하게 하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김여사라든가 등등 온갖 여성 혐오적인 발언들을 수도 없이 내뱉었다. 인터넷에서 말하는 '한국 남자'의 표본처럼, 마치 일부러 얘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나 보려는 것처럼 도발하듯 쉴 새 없이 말이다.


당연히 우리는 자주 부딪혔고 관계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안 그래도 미적지근한 둘 사이에 결정적으로 찬물을 끼얹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차로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다 어두운 골목길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 생각해도 웃겨 죽겠다는 듯 키득대며 그가 나에게 해준 말은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아니, 예전에 밤길을 걸어가는데 앞에 여자가 자꾸 흘끔흘끔 뒤돌아보는 거야, 내가 범죄자라도 되듯이 기분 나쁘게. 그래서 어떻게 했는 줄 알아? ㅋㅋㅋ 일부러 내가 막 쿵쾅거리면서 엄청 빨리 달려갔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깜짝 놀라서 확 뒤돌면서 주저앉더라고ㅋㅋ 나는 그냥 모르는 척하고 그대로 지나갔지. 엄청 웃겼는데."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 정색하고 따지자 돌아오는 말은 "그냥 장난으로 그런 거고 그 사람이 해를 입지도 않았는데 왜 그래?"였다. 공감 능력, 타인에 대한 배려- 그런 거창한 말까지 꺼내 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나도 다른 사람들이 주는 피해들 다 감수하고 사는데, 그 사람도 그래야 되는 거 아냐?"였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나를 어리게만, 아래로만 보았고 내 말을 들을 의사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불편하고 어색한 대화만 이어지다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나는 한 연예인이 거의 흡사한 이야기를 라디오에서 했다가 네티즌들에게 뭇매를 맞고 결국 공식 사과를 한 기사를 찾아냈다. 그에게 링크를 보내주자, 곧 답이 돌아왔다. "알았어ㅠ 오빠가 잘못했어요~"



그와는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은 서로가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에게 어떻게 되든 일단 꼭 얼굴을 보고 마무리 짓자고 신신당부를 했다. 물론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래도 매일 같이 목소리를 들으며 사랑을 속삭인(?) 사이인데 적어도 만나서 끝을 내는 것이 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별안간 만나기로 한 날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며 일정을 미루었다. 조만간 돌아와서 연락하겠다고. 아무래도 미심쩍어 기다리겠다고, 꼭 연락 달라고 한 내 말에 당연하다고 걱정하지 말라더니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영영 잠수를 타 버린 것이다. 당연히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지만 참 뭐랄까, 그 정도의 가벼운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기대한 내가 안쓰러웠다.



물론 그가 내 인생의 첫 혹은 마지막 놈팡이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 중 누구에게라도 어영부영 속아 결혼까지는 하는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 경험들이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이제는 그럴듯한 겉모습과 번지르르한 말솜씨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한층 레벨업 되지 않았을까 싶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시리즈로 글을 연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창작의 거름이 되어 준 그들에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이상 이 주제로 쓰고 싶은 글이 없어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저작권자ⓒ 사회가치 공유 언론-소셜밸류.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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