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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을의 사랑] 1회

최예을 / 기사승인 : 2019-11-20 01: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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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이 될 자유


"네가 더 사랑하고 매달리게 만드는 사람은 쳐다도 보지마."?




엄마가 여자로서 건네준 충고이자 당부는 이제껏 유일하고 확고했다. 요점은, 나중에 애인이 생긴면 절대 을이 되진 말 것.


따라서 오직 나를 “헤프게”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것! 평생 밀도 높게 을의 사랑을 해온 엄마가 내린 결론임을 너무도 잘 아는 우리 자매는 뼈와 살에 그 말을 새겼다.




스물둘엔 집을 떠나 요지경 같던 서울에 왔고, 내 청년의 생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국에서 모인 온갖 사람들 속에 섞여 살다 보니 내게도 보통 사람들만큼의 다사다난한 연애 사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서 '사건'이라 함은 누가 누구를 좋아하네 싫어하네 차였네 그래서 어색해졌네, 하는 신변잡기를 포함한 해프닝의 전부를 뜻한다. 콧방귀를 절로 뀌게 하는 가벼운 얼쩡거림부터 단막극 한편의 감수성을 뛰어넘을 절절한 구애까지. 어렸던 그 녀석들이 쓴 연애 흑역사 한 조각에는 내가 담겨 있다.




그런데 왜 언제나 이 사건들의 분명한 당사자인 나는, 철저히 3인칭의 시선을 가진 구경꾼처럼 굴었을까. 내겐 이불을 팡팡 찰 흑역사 하나 없고, 누구 앞에 한없이 찌질해지거나 처량해져 본 기억도 없다. 하지만 과연 그게 그렇게 떳떳할 만한 일인가?





좀 상투적이긴 하지만, 을이 되기 전 나는 마음을 주고받는 일에 너무도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었다. 물론 어느 땐 연애의 단계까지 진입하기도 했고 믿음 가는 누군가를 많이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비로소 ‘서로’ 마주보아야 하는 시점에 다다랐을 때, 내게 1인칭의 의지와 자세가 없다는 건 꽤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나는 내가 그어놓은 선 밖으론 절대 나가지 않았고, 언제든 쉽게 먼저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움켜쥐면 곧 바스락대다 사라질 것만 같던 청년의 연약한 시간을 기억한다. 사랑도 연애도 사치라 느낀 그때의 나를 이해한다. 그럼에도 사실 본질적인 원인은 하나였다.




아까워서.




지레짐작했었다. 엄마에게서 유전된 DNA 때문에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할 마음이 내게 있다고. 하지만 정작 누구에게든 그 마음을 내어주기가 무지 아까웠던 것이다. 내가 뒤늦은 중2병에 빠진 나르시시스트였을까? 난 그냥 겁보였다. 이 아까움은 사랑의 을이 될 수도 있을 가능성의 예방 혹은 절단과 제거, 나아가 결벽에 가까웠다. 뒤늦게 깨달은 건 '을은 아무나 되나'였다. 조금의 마음의 여백도 없는 나에겐 을이 된다는 것 자체가 더없는 사치였던 것이다.




그러다 만 서른이 시작된 여름, 난데없이 온 계절을 다 흔들어 놓은 사람을 만났다. 그는 한여름에 찾아온 눈(雪)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궁금했고 곧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 가끔 여러 이유로 참 아프게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디딘 이 힘없는 일상에서도 얼마만큼 더 내가 주체적인 존재일 수 있는지 매 순간 증명하게 만드는, 나는 그 사람과 사랑을 한다. 사랑한 김에 달큰한 연애도 한다. 그리곤 불효녀가 되어 어쩌면 철저히 을이 되는 사랑을 하고 있다.




내가 이토록 을의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쿨하지 않게 인정하기까지는 격렬한 거부와 부정, 모노드라마를 일일연속극 농도로 찍은 부작용 등이 있었다. 나도 흔한 멜로의 주인공처럼 상대방의 껌뻑 죽는 순정을 선입금처럼 받아놓고 싶었나보다. 솔직히 을이 폼이 나는 쪽은 아니니까. 보통의 갑을 관계에서 을은 장래에 피해를 볼 수도 있는 리스크를 안고 있다. 때론 갑이 을을 상대로 갑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게 사랑의 문제라면, 과연 갑은 을을 착취하는 걸까? 더욱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갑을관계를 이룬 그 사람과 나. 단둘만의 관계라면?




엄마가 누누이 경고한 대로 을의 입장에 서면 마음이 더 짓이겨지는 때가 잦을지도 모른다. 더 생각하고 더 그리워하다 뒤돌아서 더 작아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자발적으로 을이 되기를 결정했다. 주도권이 핵심인 게임이었다면 나는 을의 편을 택하지 않았을 거다.



폼은 안 나고 좀 찌질해도. 을이 되어볼 사치를 부리는 것도 처음이라. 나는 내게 진실한 고백이자 응원의 말을 건넨다. 이 사람에게만큼은, 내게 을이 될 자유를 허할 것!






[뮤즈: 최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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