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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온도와 닮은 여섯 편의 단편 소설들

오도현 / 기사승인 : 2021-08-20 16: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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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의 당신〉 저자 라온

책 소개



<이 계절의 당신>은 라온 작가의 첫 번째 단편 소설집이다.


책은 계절의 온도와 닮아 있는 여섯 편의 단편 소설을 담았다.


<이 계절의 당신>은 계절이 바뀌는 찰나처럼 미묘하게 흔들리는 감정들을 섬세하게 짚어냈다. 상실의 순간과 회복의 순간에 집중한 여섯 편의 단편 소설들은 평온한 듯 흘러가는 일상 속의 무참한 순간들을 담담히 짚어낸다. 또한 단정한 문장과 내밀한 묘사로 출렁거리는 인물들의 심리를 차분하게 그려낸다.


어느 순간 달라진 햇빛의 온도와 바람의 결을 새삼 깨달으며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처럼, 잔잔한 여섯 편의 소설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어떤 한 계절에 머무르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번지는 빛의 무늬처럼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결국 비슷한 결로 흐르는 소설들입니다. 어딘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이름 모를 당신에게, 어느 한 문장쯤은 가닿았으면 합니다. 저마다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삶이지만, 부디 그 무게가 너무 무겁지는 않기를."


라온 작가의 단편 소설집 <이 계절의 당신>은 독립출판서점 인디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제공 = 인디펍]
[사진 제공 = 인디펍]


저자 소개



저자: 라온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종종 혼자 궁금해 하는 사람입니다. 찬찬히 헤아려보는 걸 좋아합니다.




목차


[사진 제공 = 인디펍]
[사진 제공 = 인디펍]



본문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시골 학교답게 운동장이 널찍했다. 잘 관리되진 않았지만 화단마다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군데군데 질서 없이 큼지막한 벚나무나 단풍나무가 우뚝우뚝 서 있어 봄볕이 부드럽게 스미는 날이나, 가을볕이 대책 없이 쏟아지는 날에 가만가만 걸어 다니기 좋았다. 지독하게 어찔한 사향 나무 꽃 향이나 손바닥 위로 살풋 내려앉던 연분홍빛 벚꽃 잎, 희미하고 질긴 결대로 찢어서 한꺼번에 모래 바닥으로 흩뿌렸던 단풍잎 같은 것들이 어렴풋이, 아득하게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 ‘배웅’ 중에서 -



한산하던 장례식장을 떠올린다. 부조금만 내고 서둘러 나온 게 잘못이었을까. 걸음을 늦춘다. 우산을 얼굴 가까이 바짝 붙여 든다. 쇠 냄새가 난다. 옷깃을 여민다. 담요를 사고 갓 구운 빵을 조금씩 뜯어 먹겠다고 결심한다.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는다. 동전을 만지작거린다. 동전은 둥글다. 둥근 동전을 만지는 것만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듬성듬성 털이 빠진 야윈 개가 전봇대 밑에서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다. 빨간불인데도 횡단보도를 건넌다. 신물이 올라온다. 허기가 진다.


앞에 보이는 해장국집 안으로 불쑥 들어간다. 순댓국 하나를 시킨다. 식당 안에는 사람이 몇 없지만 텔레비전 소리가 커서 북적거리는 느낌이 든다. 혼자만의 느낌일지도 모른다. 순댓국을 기다리는 동안, 무릎을 마주대고 앉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다가 손등에 패인 흉터를 쓸어내려 본다. 그 흉터에 살살 연고를 펴 발라 주던 사람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쓴다. 아주머니가 순댓국을 내려놓자 퍼뜩 허리를 곧추세운다. 청양고추를 듬뿍 넣는다. 맵고 짠 냄새를 맡으며 뜨거운 물에 밥을 말아 천천히 먹는다. 간간이 창가를 내다본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이른 봄비에 무너질 흙더미와 드러날 식물의 뿌리와 뭉개진 얼굴을 생각한다. 구더기 떼, 썩어가는 것들의 냄새, 흰 뼈나 한 줌 재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 아니, 생각하지 않는다.


- ‘환절기’ 중에서 -



폴은 겨우내 나를 졸랐다. 봄이 되면 엄마와 함께 셋이 나들이를 가자고 노래를 불러댔다. 봄빛이 깊숙이 스민 따뜻한 날에 도시락을 싸서 가까운 공원이라도 좋으니 소풍을 가자고 재잘거렸다.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는 듯 원더풀을 외쳐댔다. 확답을 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아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고개를 주억거릴 때까지 팔을 잡고 세지 않게 흔들어댔다. 성가셔 하며 물러나면 비루먹은 강아지마냥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입술을 비죽거렸다. 안쓰럽지 않은 게 아니었지만 “그래, 가자.”, 그 한 마디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되직한 반죽을 치대듯 꾹꾹 누르고 있는 말이 있어서였다. 이제 그만하자는 얘길 해야 하는데 어떤 불안한 예감도 없이 선량하고 순하기만 한 폴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누군가 목을 조르고 있기라도 한 듯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별을 준비할 때마다 최대한 미루고 회피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야 마는 빌어먹을 습성은 어찌 된 일인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질 않았다.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설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온갖 일들을 떠안다가 지쳐 나가떨어지고 마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막상 선택의 기로에 서면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내일은 꼭, 하며 미루는 동안 유독 추웠던 겨울이 지나갔고 황사와 미세먼지 경보가 연일 발동되는 봄이 반쯤 또 지나갔다. 그 사이 나는 자취방에서 나와 엄마 집으로 들어갔고 폴은 열두 번째 일자리를 걷어치웠다.


- ‘봄 소풍’ 중에서 -



옥상 난간을 잡고 섰다. 혹시 솔이 오고 있지 않나 보려고 몸을 쑥 앞으로 내밀었다. “쏠!” 하고 목소리를 높여 솔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몸이 기울자 손아귀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그다지 높지 않은 데도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찔했다. 편두통 때문인지 모든 게 납작하게 눌려 보였다. 눈을 뜨고 있기 힘들 만큼 통증이 심했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누르다가 풀쩍 아래로 내려왔다. 별로 세게 뛰지 않았는데도 배가 당겨와 숨을 참았다. 뱃속의 아이가 발길질을 하며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신경질이 나 주먹으로 허벅지를 세게 내리쳤다. 예전 같았으면 망설이지 않고 배를 내려쳤겠지만 이젠 그러지 않았다. 허리를 수그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를 한참 내려다봤다. 등으로 쏟아지는 여름 햇볕이 뜨거웠다.


- ‘여름 밤’ 중에서 -



[소셜밸류= 오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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